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승승장구 (535년 - 536년) ==== [[파일:563.png]] 535년 여름,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상륙하였고, 동시에 문두스가 이끈 군대는 육로를 통해 동고트령 [[달마티아]]의 중심 도시인 살로나(솔린)로 진군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저항하던 [[팔레르모]]마저 12월에 점령하여 시칠리아를 제압하였고, 이탈리아 반도 상륙을 준비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테오다하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시칠리아를 양도할 것과 유스티니아누스의 종주권에 대한 인정을 맹세하였는데, 이후에 보낸 사절은 이탈리아 전부를 동로마에 양도할 것을 약속할 정도였다. 이는 동고트 왕국의 위기를 틈타서 테오도리크가 편입시켰던 프로방스와 부르군트 왕국 지역을 침공한 프랑크 왕국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한편, 536년 3월에 이탈리아 전쟁의 후방이자 보급 기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카르타고에서 군단의 반란이 일어나 벨리사리우스는 그곳으로 떠나야 했고, 4월에 반란이 진압된 후에야 시칠리아로 복귀하였다. 같은 시기인 536년 3월에 달마티아를 회복하고자 동고트 군대가 문두스의 군대를 공격하였는데, 문두스는 그들을 격파하였으나 본인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 그의 아들 마우리키우스가 동고트족의 계략에 빠져 전사하자, 분노한 문두스는 동고트 군대를 패배시키고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추격 중에 부상을 입고 결국 그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지휘관을 잃은 로마군은 철수하였다.]하며 살로나를 제외한 달마티아는 다시 동고트 왕국령이 되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테오다하두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사절을 감금하였다. 더이상의 평화 협상은 없다고 여긴 유스티니아누스는 그해 6월에 신임 일리리쿰 사령관 콘스탄티아누스를 파견하였고 벨리사리우스에게는 이탈리아에 상륙할 것을 지시하였다. 한편, 동고트 장군 그리파스는 달마티아의 주도 살로나를 결국 점령했는데, 콘스탄티아누스의 군대가 다가오고 이탈리아에 벨리사리우스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자 후퇴하였다. 따라서 콘스탄티아누스는 손쉽게 달마티아를 회복하였고 살로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였다. 같은 시기, 군대를 재정비한 벨리사리우스는 시칠리아를 떠나 6월에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였고 레기움을 점령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10월경에 [[나폴리]]에 도달하였고 20여 일의 포위 끝에 수도교를 통해 병사를 잠입시키는 계락을 써서 나폴리에 입성하였다. 그 후, 테오다하두스의 나약함과 안일한 대처에 분노한 고트족 귀족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군에서 인기가 많았던 아말라순타의 사위인 [[비티게스]]를 옹립하였다.[* 비티게스는 아말라순타의 딸이자 테오도리크 대왕의 외손녀인 마타순타와 결혼하였다. 폐주 테오다하드는 라벤나로 도주하다가 536년 말에 살해되었다.] 벨리사리우스와의 직접 대결이 시기상조라고 여긴 비티게스는 북부 이탈리아의 동고트군을 소집하기 위하여 로마시에 4천 명의 수비대만을 남기고 라벤나로 철수하였다. 나폴리 함락 이후의 약탈 소식을 듣은 로마시의 시민들은 교황 [[실베리오]]의 주도로 벨리사리우스에게 시민 대표단을 보내어 항복 의사를 내비쳤다. 로마시의 여론이 동로마 제국에 호의적인 것을 파악한 동고트 수비대 4천은 라벤나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그해 12월 9일, 수비대가 플리미니우스 문을 통해 로마시를 떠나는 것과 동시에 벨리사리우스는 아시나리아 문을 통하여 로마시에 무혈입성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